이집트이야기Egypt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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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IFE

일상

영화 속의 이집트는 황금과 저주가 많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하루는 강물, 밭, 글 쓰는 일과 신전의 창고에 더 가깝습니다. 삼천 년을 한 풍습으로 묶지 않는 것이 읽는 핵심입니다.

FLOOD

역사

범람

나일강이 해마다 넘쳤습니다. 그 물이 밭에 검은 흙을 깔고 돌아갔습니다. 이집트 달력의 첫 계절 이름이 이 넘침(아케트)입니다.

  1. 이어서 자라는 계절(페레트), 거두고 물이 낮은 계절(셰무)이 옵니다. 한 해는 세 계절입니다.
  2. 물 높이를 재는 우물(나일측정대)이 엘레판티네 등지에 있었습니다. 너무 낮으면 기근, 너무 높으면 마을이 잠겼습니다.
  3. 시리우스(이집트 이름 소프데트)가 새벽에 다시 보이는 때와 범람을 연결해 관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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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은 30일짜리 달 열두 개에, 해의 끝에 닷새를 더했습니다. 윤년이 없어서 계절과 달력이 천천히 어긋났습니다.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윤년을 넣은 시도가 있었고, 로마의 율리우스력이 그 생각을 널리 퍼뜨립니다.

범람의 원인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비입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이 그 지리학을 현대처럼 안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강의 행동을 오랜 관찰로 예측했습니다.

FARMING

역사

농사

물이 빠진 땅에 보리와 밀(에머밀), 아마를 심었습니다. 큰 기계 관개보다, 둑으로 나눈 밭에 범람을 가두었다가 쓰는 방식이 기본이었습니다.

  1. 강가의 검은 땅이 농지이고, 붉은 땅은 사막입니다. 두 색은 이집트 사람이 자기 세계를 나눈 말입니다.
  2. 파피루스는 습지 식물입니다. 글쓰기 재료이자 배, 자리, 밧줄의 재료였습니다.
  3. 세금의 많은 부분은 곡물로 걷혔습니다. 신전과 왕실이 큰 지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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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나귀로 밭을 갈고, 사람들이 씨를 뿌렸습니다. 수확 그림은 무덤 벽에 자주 나옵니다. 그 그림은 내세에도 먹을 것이 있기를 바라는 장면이기도 해서, 통계 자료로 그대로 읽으면 안 됩니다.

포도, 대추야자, 채소도 길렀습니다. 맥주는 일상 음료에 가까웠고, 빵과 함께 급료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연회 영화의 포도주만이 이집트의 식탁은 아닙니다.

WRITING

역사

글자

신전 벽에 그림처럼 새긴 글자를 상형문자라고 부릅니다. 학문에서는 신성문자라고도 합니다. 일상 서류는 더 흘려 쓴 글자였고, 글을 아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1. 신성문자는 초기 왕조부터 쓰입니다.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인 경우가 많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이나 새의 얼굴이 문장이 시작하는 쪽을 봅니다.
  2. 히에라틱은 갈대 펜으로 빨리 쓴 글씨입니다. 데모틱은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퍼진 더 단순한 필기체입니다.
  3. 서기는 배운 직업이었습니다. 농사와 품팔이보다 서기가 낫다고 권하는 교훈 글이 남을 정도입니다. 직업 안내문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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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석(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포고문)은 신성문자, 데모틱, 그리스어로 같은 취지를 적었습니다. 19세기에 토머스 영과 장프랑수아 샹폴리옹 등이 이 돌과 다른 비문을 맞춰 읽기 시작했습니다. 1822년 샹폴리옹의 발표가 결정적인 이정표로 자주 꼽힙니다. 한 사람이 하룻밤에 혼자 연 자물쇠는 아닙니다.

코프트어는 훨씬 뒤, 이집트어를 그리스 글자로 적는 전통입니다. 신전 벽의 글과 같은 시대의 글이 아닙니다.

상형문자를 비밀 주술로만 보면 어긋납니다. 왕의 이름, 세금, 편지, 재판, 기도가 다 글이었습니다. 그림이 소리와 뜻을 함께 담는 체계입니다.

TEMPLES

역사

신전

신전은 신을 모신 집이자, 땅과 창고와 일꾼을 가진 기관이었습니다. 안쪽 성소에는 사제가 들어갔고, 보통 사람은 축제와 바깥 마당에서 신과 만났습니다.

  1. 매일 신상을 깨우고, 옷을 입히고, 음식을 올리는 의례가 있었습니다. 음식은 나중에 사람의 몫으로 나누어지기도 했습니다.
  2. 큰 신전은 왕들이 계속 덧붙였습니다. 카르나크가 대표입니다.
  3. 집 안의 작은 신과 마을의 축제, 죽은 가족을 기리는 일도 신앙의 일부였습니다. 국가 신전만이 종교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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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벽의 왕은 언제나 신을 이긴 모습, 신을 만족시킨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공식 화면입니다. 전투의 실제 결과와 다를 수 있습니다. 카데시가 그 예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도 이집트 신전에 자신을 파라오로 새기게 했습니다. 그리스어 궁정과 이집트어 신전은 한 나라 안의 두 언어였습니다.

AFTERLIFE

역사

내세

많은 이집트 사람은 죽음 뒤에도 이름과 몸과 먹을 것이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시대마다 그림이 다르므로, 신왕국의 장면을 삼천 년 전체의 교리로 두면 안 됩니다.

  1. 무덤과 미라(몸을 말려 감싼 것)는 그 바람이 남긴 자리입니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절차가 길었습니다. 모래에 묻혀 자연히 마른 시신도 더 이른 시대에 있습니다.
  2. 신왕국의 장례 글에는 심장과 마아트(질서, 옳음)의 깃털을 저울에 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모음집을 오늘날 ‘사자의 서’라고 부릅니다. 이집트 제목은 ‘낮에 나오게 하는 주문’에 가깝습니다.
  3.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야기 전문은 도시와 세기마다 조금씩 달랐고, 긴 줄거리를 한 편으로 적은 책은 이집트 경전이 아니라 후대 그리스 사람의 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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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를 항아리(카노푸스 항아리)에 넣은 관습, 소다 같은 소금(나트론)으로 말린 관습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모든 시신에 같은 절차가 쓰인 것은 아닙니다. 방법을 따라 하는 안내로 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지우는 일은 두 번째 죽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왕 이름이 후대에 깎여 나간 벽이 있습니다. 하트셉수트와 아케나텐이 그 예로 자주 거론됩니다. 이유까지 하나의 감정 이야기로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저주받은 무덤이라는 현대 전설은 이 신앙과 다릅니다. 고대의 경고 문구가 일부 무덤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20년대 신문이 말한 ‘투탕카멘의 저주’는 그 문구의 번역이 아닙니다.

밥과 글자 자체를 다룬 유명한 극영화는 거의 없습니다. 출애굽을 다룬 작품은 신앙의 이야기라 여기 붙이지 않았습니다. 구분은 영화 목록에 있습니다.

근거로 삼은 기록

  • 헤로도토스 『역사』 · 2권, 범람·풍습·글자
  • 장례 파피루스 전통 · 신왕국 ‘낮에 나오게 하는 주문’, 오늘날의 사자의 서 125번 주문 등
  • 로제타 석 · 기원전 196년 포고, 세 글자
  • 교훈 문학 · 서기 직업을 권하는 글들
  • 배리 켐프, Ancient Egypt: Anatomy of a Civilization · 경제·신전·마을을 나누는 현대 개설

인용문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기록의 이름과 위치만 적습니다.